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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26 15:13

육군 첩보부대 H.I.D(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정보사령부)



○ 남한 북파공작원 부대

1. 북파공작원과 육군첩보부대(HID) 제1교육대

(1) HID 연혁
무장공작원을 훈련시키고 북파를 담당하였던 부대가 바로 육군첩보부대(HID) 제1교육대이다. 우리나라 정보담당 부서는 최초 1946년 1월 경 군정청 국방총사령부 정보과로 발족하여 1948년 8월 경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정보국으로, 이것은 다시 같은 해 11월 말경 육군본부 정보국으로 개편되었다. 1950년 7월경 육군본부 정보국내에 공작과가 새롭게 생겨남으로써 이것이 주로 첩보를 담당하게 되는데, 이 과가 영문자 HID로 표기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육군본부 정보국 공작과를 전쟁 중 첩보업무의 활성화 필요성에 따라 1951년 3월에 독립된 육군첩보부대로 발족하게 된다. ①

HID독립 전, 육군본부 정보국에는 3개 과가 있었는데, 제1과가 입수된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정보대였고, 이는 나중에 MIG(Military Intelligence Group), 즉 육군정보대가 된다. 제2과가 바로 HID이고, 이는 61년에 AIU(Army Intelligence Unit)로 (영문자만)바뀐다. 이후 1972년 2월 MIG와 AIU가 통합되어 육군정보사(AIC: Army Intelligence Command)가 된다. 이는 다시 1990년 11월에 육·해·공군정보부대가 통합되어 현재의 국군정보사령부(DIC: Defence Intelligence Command)가 된다. 제3과는 방첩부대로 특무대, CIC, 보안사를 거쳐 현재의 기무사로 발전한다.

(2) HID와 제1교육대
당시 HID는 직할대와 36지구대, 18지구대등 여러 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각 군단과 사단에 이러한 지대들을 파견했다. 한국전쟁 당시 HID소속 첩보부대는 30여개가 있었다. HID 직할대가 제1교육대였고 36지구대와 18지구대는 각기 동해안과 서해안 지역을 맡아 첩보활동을 벌였다. HID 제1교육대는 1952년 10월 말경 서울시 성북구 정능동 청수장에서 창설되어 1953년 6월까지 3기의 교육생을 배출하게 된다.② 교육생들은 공수훈련·유격훈련·중요건물 및 교량폭파·도피 및 탈출·사살·납치·교란·사격술·독도법·도둑질 등의 특전유격훈련과 공작에 필요한 훈련, 정신교육 등 16주 과정의 공작원양성교육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훈련시 분대별로 행동했는데, 야간에 북한산 계곡을 누비는 행군을 했으며 담력을 키우기 위해 야영할 때는 동굴에 낙엽을 깔고 담요 한 장으로 몸을 덮고 돌멩이나 해골을 베고 잤다고 한다. 훈련을 마친 제1기생은 53년 봄 김종벽 소령의 인솔하에 2개 중대로 나뉘어 제1중대원들은 해주 앞 용매도에, 제2중대원들은 진남포 앞 취라도등 서해안으로 침투했다. 제2기생들은 평안북도 묘향산 일대에 공수낙하하여 침투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기상악화에 의해 일부만 투하되었고, 일부는 원산 앞 여도에 합류하였다. 제2기생 일부는 휴전 후 설악대원으로 해상·육지로 침투작전에 참가했다.


제3기생은 김석환대위가 이끌고 원산 앞 여도에 침투했던 사람들이다. 한국전쟁 중 HID요원들은 그 당시 한국군이 갖고 있던 장비가 열악해 주로 미군 등 유엔군의 비행기와 선박을 이용해 공중과 해상으로 북한지역에 침투하였다. 설악대는 여도에서 철수한 제1교육대원들과 일부 잔류병들이 그 후 36지구대 예하부대로 개편된 것으로 휴전 후 침투공작을 주로 담당해 여러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들은 10명 내외의 조별로 활동했는데, 다른 조의 활동에 대해 서로가 전혀 몰랐으며 교육내용은 제1교육대와 별 차이가 없었다. 설악대의 대표적인 전과는 1954년 5월 김윤탁 소대장외 5명이 장전항 인근에 침투하여 인민군 대좌를 생포한 사건이다.③ 이 전공으로 김동석 36지구대장(소령)은 1954년 5월경에 을지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3) A I U
1961년에 이 HID가 AIU(Army Intelligence Unit)로 바뀌는데, 이는 영문자만 바뀌는 것이었지만 공작원 포섭에서부터 훈련에 이르기까지 1950년대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북파공작원의 증언에 AIU물색조로 켈로부대 출신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켈로부대의 출신들을 AIU에 고용하여 첩보원 양성에 켈로부대의 경험을 상당히 많이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AIU본부는 지금 하야트호텔이 있던 지역인 수원지 옆 보광동에 있었는데, 훈련은 강원도 OO군 OO리 첩보대훈련소, 일명 개발단에서 받았다. 정보사 물색조팀에 의해 포섭되어 1주일에 한 번씩 4회 면담한 후에 정식으로 채용되었다. 면담은 한 사람씩 앉혀 놓고 하는 일대일 면담이었다.

계약서 쓰고 도장도 찍었다고 하는데, 북파공작원의 증언에 의하며, 계약서 주요 내용은 6개월 교육을 받은 후 이북에 올라가 임무를 완수하고 살아서 돌아오면, I)사회로 복귀시킨 후 제대증도 주고, ii)평생 다달이 연금도 주고, iii)성과에 따라 보상도 주고(개인택시 한 대 분), iv)사회에 적응할 직장(경찰청특공대), v)북파 후 가족들의 생계도 책임져 준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남산야외음악당, 용산 노동회관 등지에 모여 ‘동북산업사(AIU 가명)’버스를 타고 양평동에 소재하고 있던 정보사대기소에 갔다. 거기서 머리 깎고 옷 갈아입고 밤새 강릉으로 향했다. 훈련소에서는 파고다, 백담배 등 담배는 3일에 3갑씩 지급되었고, 남산표 속옷, 북한제 계급장·옷·배낭 등이 배급되었다.

무기는 AK소총, 소련제 기관총, 탄알 90발, 세열수류탄 등이 지급되었다. 훈련은 30㎏ 배낭을 거의 매일 메고 훈련을 받았는데, 훈련소에서 훈련받은 후 인천대·문산대·전곡대·양구대·속초대·운천대 등 예하부대에 배치받았다. 인천대와 속초대는 지구대(해상침투)였고, 나머지는 지상대(육로침투)였다. 예하부대에서는 안가(안전가옥)에서 지냈는데, 그 안가에 보통 10여명이 거주했다. 안가에서 통신·살인·폭파·독도법 등을 가르쳤고 일반적으로 작전은 1조(5인에서 6인)를 편성해 했다. 훈련에 있어서는 일명 키퍼(Keeper)가 있어 조교역할을 담당했다.

1970년대 초반 설악부대 출신들의 경우 제대할 때 상병과 병장 계급장을 받았는데, 이것은 군대에 왔다갔음을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 주민등록증 앞면 병역란에 ‘첩보대’로 표기되어 있었다고 한다. 설악부대와 같은 무장유격대와는 별도로 AIU에서는 단독으로 활동하는 부대들도 양성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공작원들 증언에 의하면 청계산(일명 악마산)에 OO부대가 단독활동 공작원을 양성하는 부대였다고 한다.

또 다른 증언에 의하면 지금 삼팔교가 있는 경기도 OO군 OO리에 있는 부대도 그런 곳이었다고 한다. OO리에 있는 부대는 절취반·사진반·납치반으로 나뉘어져 절취반과 사진반은 단독침투, 납치반은 3인 1조로 작전했다고 한다. 현재에도 정보사는 강원도 모처에 이 첩보부대를 유사시에 대비해 당시 72년 규모로 유지하고 있다. 정보사에 따르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남북이 서로 공작원 파견을 자제하기로 약속함에 따라 공작원 파견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2. 미군과 한국인 첩보부대

(1) OSO와 Hans Tofte
육군첩보부대 제1교육대외에도 미군이 독자적으로 첩보부대를 관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한국전쟁 중에 미 CIA는 두 개의 외견상 독립적인 조직은 갖고 있었는데, 하나가 George Aurell가 지휘한 OSO(Office of Special Operartion)와 Hans Tofte가 이끄는 OPC(Office of Policy Coordination)가 그것이다. OSO가 스파이에 의한 첩보활동을 주로 담당하였고, OPC는 비밀공작활동을 주로 담당하였다. 이 두 개의 조직은 이후 JACK(Joint Advisory Commission in Korea)으로 통합되었다. 북파공작원들은 이 JACK을 한미합동고문첩보부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OSO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인 공작원을 모집하였는데, OSO팀들은 남과 북에 모두 존재했었다. Tofte는 그 당시 부산 영도에 있는 CIA OPC 캠프를 지휘하기 위해 한철민을 기용하는데, 이 영도부대의 주 임무는 적진 후방에서 적을 교란하는 유격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주로 이북 출신 피난민들을 공작원으로 양성하게 된다. 기밀관계로 영도부대는 이후 Y부대로 불리었으며 이 Y부대는 약 1,200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Y부대는 북한작전지역별로 4개의 소부대로 나뉘어졌는데, 강원북부와 함경남도 남부를 맡은 Yellow Dragon, 함경남도 중부를 맡은 Blue Dragon, 함경남도 북부와 함경북도 남부를 맡은 White Tiger, 함경북도 북부를 담당한 Owl부대가 그것들이었다. 1953년 휴전협정 이후 영도에 있던 CIA OPC기지는 폐쇄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첩보활동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휴전협정 후 무력충돌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CIA는 한국인 공작원을 훈련시켜 중국제 전함나포, 왕가도에 있는 수송저장소 폭파, 상하이와 진남포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절단 등 주로 해상작전을 수행했다.

(2) 미군과 한국인 첩보부대
미군 내에 제6004항공정보대(6004th Air Intelligence Service Squadron)의 문관이었던 Donald Nicols도 한국에서의 첩보활동에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제6004정보대가 일명 NICK이라고 불린 것 같다.이 부대가 1953년 제6006항공정찰정보대(6006th Air Reconnaissance and Intelligence Squadron)로 개편되었으며 그 후 1957년까지 Nicols는 이 부대에 계속 근무한 것으로 보인다. 이 Donald Nicols는 허정, 이승만 전대통령 등과 아주 절친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중에 그의 주요 임무는 NICK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었는데, 이와는 별도로 이승만 전대통령을 위해 공작부대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북파공작원 출신들은 HID도 이 니콜스가 구상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미 제24군단 정보처 산하에 대북공작을 담당했던 첩보부대인 ‘442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있었는데, 그 CIC가 이후 1948년 켈로(KLO: Korean Liaison Office)부대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중에 이 켈로부대와 ‘6006’ 부대말고도 미국무성 산하의 SOU(Special Operation Unit)라는 첩보부대가 있었다. SOU도 켈로와 유사한 임무를 띤 부대였지만 창설시기가 1952년 4월로 비교적 늦었다. SOU는 대원들을 뽑아 사이판 미군기지에서 훈련을 시켰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의 증언속에서도 미군이 지휘한 첩보부대로 잭, 닉, 월백, 동키부대, 켈로(KLO)부대 등이 언급된다.

(3) 켈로와 한국인 첩보원
1946년 미 제24군단 정보처 산하에 ‘442CIC’가 창설되는데 이적인 1948년 8월 미극동사령부 정보처에서 이 ‘442CIC'와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던 정의사 등 여러 반공단체를 망라하여 켈로부대를 만든다. 켈로부대는 1948년 CIC산하에 대북첩보를 위해 주로 서북청년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북출신을 중심으로 창설된다. 이 켈로부대는 고트(Goat: 대장 최규봉), 선(Sun: 대장 전훈), 위스키(Whiskey: 대장 박태현) 등 3개의 지대로 나뉘어 활동했는데, 각 대별로 통상 2-3백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도서지역(초도·영종도·백령도·주문진 등)에는 파견대를 설치 운영하였다. 구성원들은 각 지대대장이 직접 모집하였고 첩보원들은 민간인 신분이었다.

1951년 9월에 이 켈로부대는 ‘8240부대’로 유격군 및 첩보부대를 통합 운영하게 되는데, 베이스캠프는 용산 선린상고에, 본부는 종로 태화관에 설치했다. 이 부대는 계인주대령이④ 지휘를 맡게되고 공작과장은 최규봉씨가, 군수 및 보급과장은 전훈씨가, 연락과장은 박태현씨가 맡았다. 1952년 6월 켈로부대는 ‘8240부대’에서 이탈해 다시 독자적인 부대로 활동하다가 1953년 9월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 전격 해체하게 된다.

이 켈로부대에는 여성첩보원도 있었는데, 남녀 대원의 성비가 약 8대2정도였다고 한다. 여성들은 주로 북한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적지에서 의심을 덜 받기 때문에 생존율도 남성대원들보다 높았다. 이 여성첩보원들은 남성대원과 함께 부부로 가장해 침투하기도 하였다. 켈로부대는 한국군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고 비밀로 붙여졌는데,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독자적으로 재판, 처형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비공개적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발발 후 해산때까지 공식적인 첩보대로 활동하게 된다.⑤

한국전쟁 중에 활발한 활동으로 여러 전과를 올리게 되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전과가 인천상륙작전 때 ‘팔미도등대 점령작전’이었다. 계인주대령, 연정, 최규봉 등 3인이 1950년 9월 14일 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인천 앞 바다 팔미도등대를 점령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그동안 이 켈로부대 출신들은 국가의 배려를 받지 못하다가 『참전군인등지원에관한법률』에 의해 지난 1996년에 들어서야 2,410명의 켈로출신 전사자들이 대전 국립묘지에 봉안되었고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에 따라 생존자 230여명의 군번없는 전사들이 군번과 참전용사증을 받게 되었다. 명단이 확인된 대원 중 전사·실종자 총수가 3,415명이고 생존대원 총 수는 35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이 켈로출신 생존자들이 KLO·8240전우총연합회(대표 최규봉)라는 모임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동안 총연합회는 회원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장학금지원, 팔미도등대에 기념비 건립, 팔미도점령기념행사 등의 활동을 해왔다.

① 독립된 첩보부대 HID의 최초 부대장이 이철희,장영자사건의 이철희씨이다.
② 전체숫자는 정확하지 않으나 북파공작원이었던 박부서씨는 800여명으로 증언하고 있는데, 일부 정확히 확인된 숫자는 제1기생이 150명, 제2기생이 144명, 제3기생이 72명으로 366명이다.
③ 이것으로 납남자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④ 당시 켈로부대에서 공작과장으로 근무했던 최규봉씨(현 KLO-8240 전우총연합회 회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계인주대령은 이후 HID 창설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⑤ 이 작전의 성곡으로 최규봉씨는 1957년 11월 맥아더로부터 감사장을 받게된다.

육군 첩보부대 HID는 Headquarters of Intelligence Detachment(정보사령부)의 약자를 따서 H.I.D라고 부릅니다.

참고로 해군 첩보부대는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 공군 첩보부대는 OSI(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는데..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실미도 684부대는 공군첩보부대인 OSI가 훈련시킨 부대입니다.

그리고 각군의 북파공작부대(HID,UDU,OSI)는 전부 정보사로 통합되었습니다. 또 90년대 부터는 예전처럼 대규모로 북파공작원을 양성하지 않고 또 보내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자료수집/북공연구소,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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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jm.ufree.kr BlogIcon 코프 2009.02.06 10: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직도 H.I.D 는 진짜로 북파 공작원으로 파견 되었던 부대였느냐,
    아니면 훈련만 받았던 부대 였느냐로 싸우죠...

    저번 촛불집회 때도 H.I.D 부대가 논란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진짜들은 가만히 있는데 대변인들은 날 뛰는 꼴 같이 보여서;;


    p.s RSS 주소 수정하셔야 겠습니다 :)

  2. 레토크 2013.02.24 16: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리가 아주 잘 되있네요. 덕분에 몰랐던 추가 정보들을 알아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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